미국 오케스트라 가운데 가장 유럽적인 사운드를 가진 최상급 관현악단,
'미국 Big5' 오케스트라 Cleveland Orchestr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조지 셀, 로린 마젤, 크리스토프 폰 도흐마니 등 거장 지휘자들이 두루 거쳐갔고, 수 많은 음반을 통해서 애호가 및 비평가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미국의 Big5를 넘어 전세계 Big5 오케스트라로 인정 받고 있다.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에 이어 1946년 조지 셀이 음악감독으로 발탁. 셀은 미국과 유럽 관현악단의 장점을 모두 살린 최상급 관현악단을 목표로 체계적인 계획 수립과 엄격한 연습을 감행했으며, 실력이 모자라다고 생각되는 단원들은 가차없이 해고. 1970년에 타계할 때까지 장기 재임하면서 미국의 '빅5(5대 관현악단)'에 들 만큼 높은 수준을 유지시켰으며, 세계 각지로 순회 공연을 하는 등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002년에 프란츠 뵐저 뫼스트가 취임해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아티스트
프란츠 벨저 뫼스트 (Franz Welser-Most) | 지휘자벨저 뫼스트는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전직 국회의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나 18세때 교통사고로 손가락에 부상을 입고 지휘로 전공을 바꿨다. 26세때는 푸르트벵글러를 숭배하는 괴짜 사업가 안드레아스 폰 베닉센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로 입적됐다. 그는 벨저 뫼스트르를 ‘21세기의 푸르트벵글러’로 만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1979년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 결선에 진출했고 85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데뷔했다. 1986년 헤수르 로페스 코보스의 대역으로 런던 필을 지휘해 모차르트 레퀴엠을 연주해서 대성공을 거뒀고 1990년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후임으로 런던 필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1998년 빈 필 정기 연주회 지휘대에 올랐고 2002년부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에 올랐다. 2007년 빈 슈타츠오퍼의 신연출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했고 2010년부터 세이지 오자와의 후임으로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에 취임한다. 2011년 빈 필 신년 음악회 지휘자로 결정됐다. 취리히 오페라에서는 2005년부터 음악총감독을 맡아 2011년까지 계약을 해놓은 상태다. 오스트리아 출신이 빈 슈타츠오퍼의 사령탑을 맡기는 1964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사임한 후 36년만의 일이다. 1995년 런던 필하모닉 내한공연 때 소프라노 조수미와 협연하면서 국내팬들을 처음 만났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Cleveland Orchestra)
음악감독 - 프란츠 벨저 뫼스트
계관 음악감독 -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부지휘자 - 제임스 페덱, 티토 무뇨스
합창 지휘자 - 로버트 포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1918년 아델라 프렌티스 휴스가 초대 수석지휘자 니콜라이 소콜로프와 공동 설립했다. 창단 초창기부터 연주여행으로 미국 동부를 순회했으며 라디오 실황방송에도 참여하면서 음반 녹음도 활발히 했다.
소콜로프 이후의 수석지휘자들에게는 음악감독의 명칭도 부여됐다. 아르투르 로진스키(1933~1943), 에리히 라인스도르프(1943~1944), 조지 셸(1946~1970), 피에르 불레즈(음악 고문 1970~1972), 로린 마젤(1972~1982),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1984~2002)가 그들이다. 현재 프란츠 벨저 뫼스트가 지난 2002년부터 음악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임기는 2017~2018시즌까지이다. 조지 셸이 장기집권하면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그 실력과 명성을 제고하고 존재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셸은 1950년대 오케스트라의 구조를 바꾸고 체질을 개선했다. 당시 셸은 수십 명의 단원들을 해고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단원들이 스스로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셸은 또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 독특하고 뚜렷한 유러피언 사운드를 덧입혔다. 셸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채찍질해 야심찬 레코딩 스케줄을 소화해 내면서 전세계의 수백만 애호가들에게 음악의 감동을 전달했다. 그가 사망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 셸이 드리운 그림자와 영향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조지 셸이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와 말러에서 보여준 정통 유러피언 사운드는 헤비급 지휘자의 면모를 지녔다. 특히 드보르자크나 야나체크, 바르토크 등 동구권 지휘자 해석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후 도흐나니 시절에는 떡갈나무같은 셸의 우직함 대신 특유의 비단결같은 ‘실키 사운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브루크너 교향곡과 브람스 교향곡 등에서 더없이 포근하면서 엄격함이 내재된 순도 높은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다.
클리블랜드는 이른바 미국 ‘빅 파이브’ 오케스트라가 포진한 도시들 가운데 가장 소규모의 도시이다. 나머지 네 오케스트라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와 시카고이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의 연주가들은 지역의 명사로 대접받는다. 스포츠 영웅을 대하는 것처럼 클리블랜드의 팬들은 공연이 끝나면 연주가들을 기다려 사인을 받고 길거리에서도 인사를 건넨다. 클리블랜드 사람들은 위에 언급한 대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다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의 팬들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투어를 마치고 도착하면 “우리가 최고다! 우리가 최고다!”라고 노래하면서 ‘브라보!’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흔들며 환영 세레모니를 했다고 한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방대한 레코딩 중에는 역대 음악감독들이 지휘한 것 말고도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올리버 너센, 쿠르트 잔데를링, 요엘 레비, 리카르도 샤이, 마이클 틸슨 토마스 등 객원지휘자들과의 뛰어난 연주도 다수 존재한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본거지는 세브란스 홀로, 1931년에 지어졌다. 대부분의 콘서트를 이곳에서 소화하며, 리허설 용도와 행정 사무실로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