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패션 시리즈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김선욱 협연)
100
10,000
1,400
일시
2010.05.03 ~ 2010.05.03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주최
㈜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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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REVIEW
PLAY ARTISTS
공연정보
고전적 명연주의 보고,
런던 빅 5 오케스트라의 중심 필하모니아의 내한공연
필하모니아는 1945년 10월 28일, 영국 최고의 음반사 HMV(현 EMI)가 자사 소속 아티스트 레코딩을 위한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됐다. EMI 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주도 아래 카라얀,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클렘페러가 공연과 녹음 활동을 병행하면서 영국 최고의 신흥 악단으로 발돋움했다. 1995년 야블론스키, 정명훈과 함께 내한공연을 가진 필하모니아가 14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투어의 지휘봉은 세기적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메이저 레이블에서 내놓은 엄청난 수량의 지휘 음반과 명연을 통해 거장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아쉬케나지가 잡는다. 협연 파트너는 깊이가 다른 고전 레퍼토리 해석력과 세련된 매너로 필하모니아 후원자 그룹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김선욱과 돌아온 바이올린의 전설 정경화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 | 지휘
1937년 7월 6일, 소련 태생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아버지는 유태계, 어머니는 비유태계 러시아인이다. 현재는 아내의 고국 아이슬랜드 국적을 갖고 있고 스위스에 거주 중이다. 러시아 고르키(현 니지니 노브로고드)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나 6세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2년후 모스크바 데뷔 연주회를 열었고 9세에 모스크바 음악원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1955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콩쿠르에 출전해 2위에 올랐다(우승은 아담 하라시에비츠_Adam Harasiewicz). 아쉬케나지가 우승을 놓친 것을 두고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 리가 심사위원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이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 우승을 거뒀고 이후 유럽과 북미로 떠난 연주투어가 성공을 거두며 EMI와 멜로디야 레이블에서 레코드를 발매했다. 1962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존 옥던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경부터 지휘를 시작해 1974년 지휘자로 첫 녹음을 실시했다. 지휘 활동의 초기에 는 런던 심포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열 콘서트헤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했다. 1987년 로열·필하모닉 음악 감독으로 취임해 1994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체코 필, NHK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과 수석지휘자를 역임했다. 현재는 시드니 심포니와 유럽연합 유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직중이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의 러시아 레퍼토리에 대단한 친화력을 과시한다. 또한 베토벤, 시벨리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는다. 1980년대 초반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절정의 호흡을 과시하면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고 엑스톤 레이블에선 라흐마니노프의 합창 음악만을 모아 음반을 발매했다. 필생의 역작인 ‘종’은 체코 필과 프라하 필 합창단과 재녹음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는 2002년 일본 산토리홀에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6번을 연주해 실황 음반을 남겼다. 현재 라흐마니노프 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세계 각지에서 라흐마니노프 프로젝트로 명명된 기획 공연을 가지면서 라흐마니노프 작품의 보급과 소개에 힘쓰고 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Philharmonia Orchestra)
수석지휘자 겸 예술고문 - 에사 페카 살로넨
종신 명예지휘자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명예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
수석객원지휘자 -찰스 매커라스 경
계관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1995년부터 로열 페스티벌 홀의 상주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1945년 월터 레그에 의해 창설됐다. 창설 당시 가끔씩 공연을 갖기도 했지만 원래는 레그가 프로듀서로 일했던 EMI의 음반 녹음을 위한 오케스트라였다. 1946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데뷔 콘서트를 가진 것은 1946년으로 토마스 비첨이 지휘봉을 잡았다. 비첨은 수석지휘자 물망에도 올랐으나 곧 물러나야 했다. 오케스트라의 전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름을 바꾸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비첨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미련을 두는 대신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설하는 길로 가닥을 잡았다.
초창기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토스카니니 측의 허락을 받지 못해 1990년대에야 정식 출반될 수 있었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를 비롯한 많은 거장 지휘자들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음반을 녹음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시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가장 많이 연주한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관계된 공식적인 직함은 전혀 없었지만,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앙상블 중 하나로 만들어 냈고,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1954년 카라얀은 사망한 전임 푸르트뱅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선출됐다. 그간 ‘밀월’이라 불릴 만했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는 이후 그 횟수가 자연스럽게 줄게 되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새로운 선장을 필요로했고, 오케스트라의 실질적인 오너였던 월터 레그는 카라얀에서 오토 클렘페러로 갈아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귀재’ 레그다운 영감에 찬 결정이었다. 당시 클렘페러는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던 지휘자였지만 거기서 잠재력을 발견한 것이다. 위대한 레코딩이 종언을 고하기 전 ‘인디안 서머’ 같던 시절에 클렘페러의 이름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불가결하게 각인되었다. 1959년, 클렘페러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 3월 10일, 월터 레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해체를 발표했다. 오토 클렘페러와의 레코딩 세션차 모인 단원들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해체되는 것에 반대하며, 그냥 지켜보지 않겠다고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이 사실을 듣고 클렘페러는 그 즉시 자신도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일주일 뒤인 3월 17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체적으로 이사회를 새로 구성하고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새로운 후원회 구성 후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취임 콘서트가 1964년 10월 27일 개최되었다. 이제 명예회장 직함을 단 클렘페러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의장으로 수석 플루티스트였던 가레스 모리스가 재임했다.
단원들의 자치 체제가 된 이후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레그 휘하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실황 공연을 통해 청중과 만남을 가졌다.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계승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해졌고, 결국 1977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을 되찾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이들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클렘페러는 1971년 지휘대에서 은퇴했다. 그렇지만 1973년 사망할 때까지 수석지휘자 직함은 계속 유지했다. 이 기간동안 로린 마젤이 준 수석 지휘자(associate principal conductor, 1971~1973)에 올랐는데, 사실상의 수석지휘자였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수석지휘자는 리카르도 무티였다. 이후 1984년부터 1994년까지 주세페 시노폴리가 무티의 뒤를 이었고, 1997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수석지휘자에 취임, 2008년까지 활동했다. 재임시절 도흐나니는 종신 명예지휘자 타이틀을 얻었다. 2006년 11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제5대 수석지휘자로 에사 페카 살로넨을 임명했다. 살로넨은 2008/2009시즌부터 지금까지 수석지휘자로 재임하고 있다. 살로넨과 필하모니아의 인연은 짧지 않았다. 20년 넘는 기간동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거나 함께 음반을 녹음해 왔다. 살로넨은 1985년부터 1994년까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세계에서 가장 녹음량이 많은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무려 천여 종이 넘는 녹음을 보유하고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4년작 영화인 ’헨리 5세‘ 그리고 데이비드 린의 ’올리버 트위스트‘(1948)같은 고전 영화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영화 음악 사운드 트랙에서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런던 빅 5 오케스트라의 중심 필하모니아의 내한공연
필하모니아는 1945년 10월 28일, 영국 최고의 음반사 HMV(현 EMI)가 자사 소속 아티스트 레코딩을 위한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됐다. EMI 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주도 아래 카라얀,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클렘페러가 공연과 녹음 활동을 병행하면서 영국 최고의 신흥 악단으로 발돋움했다. 1995년 야블론스키, 정명훈과 함께 내한공연을 가진 필하모니아가 14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투어의 지휘봉은 세기적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메이저 레이블에서 내놓은 엄청난 수량의 지휘 음반과 명연을 통해 거장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아쉬케나지가 잡는다. 협연 파트너는 깊이가 다른 고전 레퍼토리 해석력과 세련된 매너로 필하모니아 후원자 그룹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김선욱과 돌아온 바이올린의 전설 정경화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 | 지휘
1937년 7월 6일, 소련 태생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아버지는 유태계, 어머니는 비유태계 러시아인이다. 현재는 아내의 고국 아이슬랜드 국적을 갖고 있고 스위스에 거주 중이다. 러시아 고르키(현 니지니 노브로고드)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나 6세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2년후 모스크바 데뷔 연주회를 열었고 9세에 모스크바 음악원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1955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콩쿠르에 출전해 2위에 올랐다(우승은 아담 하라시에비츠_Adam Harasiewicz). 아쉬케나지가 우승을 놓친 것을 두고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 리가 심사위원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이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 우승을 거뒀고 이후 유럽과 북미로 떠난 연주투어가 성공을 거두며 EMI와 멜로디야 레이블에서 레코드를 발매했다. 1962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존 옥던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경부터 지휘를 시작해 1974년 지휘자로 첫 녹음을 실시했다. 지휘 활동의 초기에 는 런던 심포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열 콘서트헤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했다. 1987년 로열·필하모닉 음악 감독으로 취임해 1994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체코 필, NHK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과 수석지휘자를 역임했다. 현재는 시드니 심포니와 유럽연합 유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직중이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의 러시아 레퍼토리에 대단한 친화력을 과시한다. 또한 베토벤, 시벨리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는다. 1980년대 초반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절정의 호흡을 과시하면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전집을 녹음했고 엑스톤 레이블에선 라흐마니노프의 합창 음악만을 모아 음반을 발매했다. 필생의 역작인 ‘종’은 체코 필과 프라하 필 합창단과 재녹음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는 2002년 일본 산토리홀에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6번을 연주해 실황 음반을 남겼다. 현재 라흐마니노프 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세계 각지에서 라흐마니노프 프로젝트로 명명된 기획 공연을 가지면서 라흐마니노프 작품의 보급과 소개에 힘쓰고 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Philharmonia Orchestra)
수석지휘자 겸 예술고문 - 에사 페카 살로넨
종신 명예지휘자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명예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
수석객원지휘자 -찰스 매커라스 경
계관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1995년부터 로열 페스티벌 홀의 상주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1945년 월터 레그에 의해 창설됐다. 창설 당시 가끔씩 공연을 갖기도 했지만 원래는 레그가 프로듀서로 일했던 EMI의 음반 녹음을 위한 오케스트라였다. 1946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데뷔 콘서트를 가진 것은 1946년으로 토마스 비첨이 지휘봉을 잡았다. 비첨은 수석지휘자 물망에도 올랐으나 곧 물러나야 했다. 오케스트라의 전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름을 바꾸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비첨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미련을 두는 대신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설하는 길로 가닥을 잡았다.
초창기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토스카니니 측의 허락을 받지 못해 1990년대에야 정식 출반될 수 있었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를 비롯한 많은 거장 지휘자들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음반을 녹음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시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가장 많이 연주한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관계된 공식적인 직함은 전혀 없었지만,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앙상블 중 하나로 만들어 냈고,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1954년 카라얀은 사망한 전임 푸르트뱅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선출됐다. 그간 ‘밀월’이라 불릴 만했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는 이후 그 횟수가 자연스럽게 줄게 되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새로운 선장을 필요로했고, 오케스트라의 실질적인 오너였던 월터 레그는 카라얀에서 오토 클렘페러로 갈아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귀재’ 레그다운 영감에 찬 결정이었다. 당시 클렘페러는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던 지휘자였지만 거기서 잠재력을 발견한 것이다. 위대한 레코딩이 종언을 고하기 전 ‘인디안 서머’ 같던 시절에 클렘페러의 이름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불가결하게 각인되었다. 1959년, 클렘페러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 3월 10일, 월터 레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해체를 발표했다. 오토 클렘페러와의 레코딩 세션차 모인 단원들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해체되는 것에 반대하며, 그냥 지켜보지 않겠다고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이 사실을 듣고 클렘페러는 그 즉시 자신도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일주일 뒤인 3월 17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체적으로 이사회를 새로 구성하고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새로운 후원회 구성 후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취임 콘서트가 1964년 10월 27일 개최되었다. 이제 명예회장 직함을 단 클렘페러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의장으로 수석 플루티스트였던 가레스 모리스가 재임했다.
단원들의 자치 체제가 된 이후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레그 휘하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실황 공연을 통해 청중과 만남을 가졌다.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계승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해졌고, 결국 1977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을 되찾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이들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클렘페러는 1971년 지휘대에서 은퇴했다. 그렇지만 1973년 사망할 때까지 수석지휘자 직함은 계속 유지했다. 이 기간동안 로린 마젤이 준 수석 지휘자(associate principal conductor, 1971~1973)에 올랐는데, 사실상의 수석지휘자였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수석지휘자는 리카르도 무티였다. 이후 1984년부터 1994년까지 주세페 시노폴리가 무티의 뒤를 이었고, 1997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수석지휘자에 취임, 2008년까지 활동했다. 재임시절 도흐나니는 종신 명예지휘자 타이틀을 얻었다. 2006년 11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제5대 수석지휘자로 에사 페카 살로넨을 임명했다. 살로넨은 2008/2009시즌부터 지금까지 수석지휘자로 재임하고 있다. 살로넨과 필하모니아의 인연은 짧지 않았다. 20년 넘는 기간동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거나 함께 음반을 녹음해 왔다. 살로넨은 1985년부터 1994년까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세계에서 가장 녹음량이 많은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무려 천여 종이 넘는 녹음을 보유하고 있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4년작 영화인 ’헨리 5세‘ 그리고 데이비드 린의 ’올리버 트위스트‘(1948)같은 고전 영화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영화 음악 사운드 트랙에서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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